김밥천국 (로마서 14:1-23)
“김밥천국” (로마서 14:1-23)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1. 교회 내 다양성 인정 = 조화 (본질)
더 자두의 “김밥”이라는 노래 “잘~ 말아줘~ 잘 눌러줘~”
저는 김밥을 좋아합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차에서 김밥을 먹으며 왔습니다.
김밥은 굉장히 매력적이죠. 맛살, 햄, 깻잎, 참치, 계란 등의 다른 맛을 내는 재료들이 ‘김’에 하나로 싸여서 하나의 맛을 냅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데 천국도 그런 곳이지 않을까요?
햄처럼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계란처럼 손 많이 가는 사람, 참치처럼 주인공이 되려는 사람, 깻잎처럼 받쳐주기만 하는 사람 등등 각기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김에 하나로 싸여 조화로운 맛을 내는 곳. 아주 멋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지요.
2. 다양성 인정 x = 갈등 (비본질)
제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 어머니께서 김밥을 싸주셨었는데
편식이 심해서 맛살을 못 먹었던 형의 김밥에 햄을 두 개 넣어서 싸셨더니 부득이 제 김밥에 넣을 햄이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절반은 맛살로 채워서 맛살 2개 김밥을 만들어 주셨죠.
소풍 가서 친구들과 함께 김밥을 까먹는데, 친구들이 제 김밥을 보더니 마구 웃으며 놀리더라구요.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쓰잘데기 없는 논쟁이 벌어졌죠.
‘과연 햄 없는 김밥은 김밥인가?’
결국은 어린 초등학생들의 기준에서 ‘김밥이 아니다~!’로 판명이 나고 매우 창피를 당하며 도시락을 먹지도 않고 그냥 가져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면, 김밥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지 않습니까? 햄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도 돈까스 김밥, 치즈김밥, 야채김밥, 샐러드김밥.
햄이 없어도 ‘김밥’이죠. 왜냐하면 김밥의 본질인 ‘밥’이 있고, 그 안에 뭐가 들어가든 잘 감싸 안아 하나로 만드는 ‘김’이 있으니까요.
3. 본문해석 / 비본질적인 다툼 -> 본질을 깨트림
이게 무슨 아침부터 쓸데없는 도시락 까먹는 소리인가?
오늘 본문에도 로마교회 안에 이 쓸데없는 도시락 까먹는 문제로 다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교인이 과연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당시 로마 사회는 고기를 이교도의 신 즉,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판매를 했습니다.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레위기 11장 율법에 따라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라며 채식을 고집했지요. 반면에 고기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비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에 율법의 음식 규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고기는 그냥 고기일 뿐이다.’라며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이 쓸데없는 논쟁은 자존심 문제로 번져 서로를 향한 부정적 태도로 발전했지요. 결국 서로의 생각을 포용하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어 옆구리가 터져버린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6절을 통해 영화 곡성의 유명 대사와 같이, ‘도대체 뭣이 중헌디?’라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어 솔로몬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리지요.
판결 주문: “주를 위한 것이면 괜찮다.”
판결 이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새로운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 주인을 기쁘시게 하며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
둘, 혹 바른 교리를 주장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무익하다.
제가 초등학교 소풍에서 창피를 당하고 있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중재를 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김밥에 햄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가 뭐가 중요해? 맛있기만 하면 되지!!
쓰잘떼기 없는걸로 싸우지 말고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 하시며 당신의 소불고기 김밥 한 줄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성함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습니다.
“신선영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영쌤, 제 선생님은 아니셨지만 뵐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뭐가 중요하냐? 뭐든 주를 위한 것이면 그만이지!!
그것보다 쓰잘떼기 없는걸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다. 이게 본질이다!’라며 터진 옆구리를 하나님의 참뜻이 발린 김으로 잘 감싸 안고 있는 것입니다.
4. 말씀과 삶의 연결
우리도 때때로 본질은 뒷전에 두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킬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만큼 교단의 교파가 많이 나뉜 곳도 없다고 하지요. 약 250여개의 분파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분파는 강단에 카페트를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하냐, 선한 목자를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하냐를 두고 갈등을 빚어 나뉘어진 곳도 있답니다.
정말 ‘뭣이 중한가’ 싶습니다.
카페트 색깔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복음의 맛을 내는 것이 본질인데, 그걸 깨트릴 만큼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5. 적용 – 삶의 문제
이전에 서울에서 사역했던 교회 고등부는 ‘양떼 목장’ 소위 말하는 ‘양아치 소굴’이었습니다.
예배시간이 10시 30분이었는데, 찬양이 끝나고 예배 시작할 때 종을 치듯이 10시 40분만 되면 밖에 오토바이 소리가 종을 대신합니다.
“아따~ 예배보기 좋은 날이구마이!” 욕을 해대며 교회로 들어오는 아이들.
고등부 150명 중에 60여명이 이런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지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아이들로 가득 찬 교회는 아니었어요.
어느 주일날 새벽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데 집이 멀어 전날 교회에서 잠을 잤지요.
분명히 문단속을 꼼꼼히 하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아래 유치부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환청이겠거니 하고 다시 잠들었죠.
새벽에 일어나니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들려 놀라서 뛰쳐 내려가 봤습니다.
검도 유단자이신 한 장로님께서 빗자루를 들고 두 학생을 혼내고 계셨습니다.
자초지정을 물으니 가출한 학생들인데 새벽이 너무 추웠답니다. 그런데 지나가다가 제가 미처 잠그지 못한 유치부 뒷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들어와서 실에 꾸며져 있는 부직포를 뜯어 덮고 잠을 잔겁니다. 이걸 유치부 부장이셨던 이 장로님이 보시고 새벽에 따뜻한 매질을 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 아이들이 괜스레 측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새벽예배를 얼른 마치고 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앞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였습니다. 그리곤 먹은 값은 해야 한다며 다시 교회로 데려와 같이 고등부 예배를 드렸지요. 그리고 보낼 때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왠만하면 집에 들어가고- 아니면 쉼터라도 가고- 정 안되면 교회로 또 와라!” 했더니 그 다음주에 진짜 눈치없이 또 오더라구요.
그 친구들은 그렇게 두 번 오고 안 왔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설렁탕 사달라는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덕분에 전도와 호구의 애매한 경계 속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설렁탕이 아닌 이 아이들과 신뢰로 관계가 맺어지면서 교회를 열심히 나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이 아이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로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목사님, 저런 애들 자꾸 오면 기존에 다니던 애들 ‘불편해’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 마음 한 켠이 불편해 지더라구요.
마치 ‘제사 고기를 먹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것처럼,
‘교회는 바르고 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선입견과 그 아이들의 다름에 대한 편견으로 구분 짓고 밀어내려는 모습에 다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요. 그리고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엇이 맞는걸까..? 무엇이 중한가..?’
그런데 한 켠으로는 장로님의 말씀도 이해가 됐습니다.
장로님의 염려는 아마, 아직 어린 청소년기이기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 공동체가 와해되진 않을까 하는 본질에 대한 염려에서 기인한 말씀이셨겠지요.
그래서 장로님께 ‘죄송합니다 장로님. 교회가 오는 학생들을 막을 순 없으니, 그 안에서 갈등 없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5년 사역하는 동안 이것을 제1의 기도제목으로 삼았죠.
다행이고 감사하게도 장로님의 염려는 기우가 되었고 기존에 다니던 학생들이 불편해 하거나 동화가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양 떼’들이 긍정적으로 동화가 되어 정적이었던 부서 분위기를 매우 동적이고 열정적이게 바꿔 놓았죠. 그 중 하나는 지난번에 나눴듯, 회장으로 뽑혀서 학급 전체를 전도하는 부흥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외적인 조화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굉장히 고무적이었던 것은
기존에 신앙생활을 해왔고 뿌리가 깊은 아이들을 리더 또는 헬퍼로 세워 목장을 운영하게 했더니 ‘열정은 있지만 깊이가 없던 양 떼 아이들’을 책임감 있게 잘 챙겨줬습니다.
예배시간에 성경을 찾아주기도 하고, 주일날 안나오면 토요일날 심방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좋지 않은 향기가 나면 교회 올 때 만이라도 향기롭게 오라며 선도도 하면서 기존 아이들에게도 사명감이라는 것이 생기더라구요.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옆구리 터짐 없이 잘 감싸 안아 조화롭게 맛있고 멋있는 김밥 같은 고등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서로의 다름에 집중해서 갈등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니까
서로의 다름이 오히려 하모니가 되었습니다.
6. 결단
1) 요즘 ‘Latte is horse’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라떼는 말이야’이죠.
세대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해 빗어진 갈등을 상징하는 현대 신조어이죠.
가정, 학교, 교회, 직장을 불문하고 살아온 환경과 삶의 방식이 다른 세대 간의 불화는 예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죠. “우리 때는 레위기 11장 음식 규정 다 지켰어!”
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죠. “언제적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율법 완성하시면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WBC 성경주석에서 이 갈등에 대해 이렇게 명쾌한 한 줄로 정리하고 있더라구요.
“진리에만 틀림이 있지 그 외에는 다름이 있을 뿐이다.”
서로의 다름에 집중하여 갈등을 야기하기보다, 본질에 집중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 오히려 하모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기성세대에 대해 “라떼 이야기”라며 무안을 주거나 옛것으로 취급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오늘을 있게 만든 헌신의 주춧돌이기 때문이죠. 그 안에 저와 같은 젊은 세대가 경험해보지 못한 큰 지혜와 헌신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젊은 세대는 이전과는 다른 환경,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이전의 환경에 비추어 “하여튼 요즘 것들은!”이라며 사명감과 열정 없는 세대로 생각지 않아야 겠습니다. 그 안에서 기성세대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것과 창의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 학교에도 다양한 친구들이 있지요.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결국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조화롭게 맛있고 멋있는 김밥과 천국 같은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