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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 우울증 (디모데전서 6:5-8)
1.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죠. 내 자식보다 나은 남의 자식을 가리키는 말이죠.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더 잘 되라는 의미로 소개한 대상이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날벼락처럼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종의 ‘빌런’(악당)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SNS’로 인해 ‘엄친아’라는 말은 거의 잊혀졌습니다. 대신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것이 생겨났죠.
혹시 ‘카페인 우울증’이 무슨 말인지 아실까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인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줄여서 ‘카페인’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런데 ‘카페인’에 올라오는 게시물의 상당수가 해외여행 간 이야기, 분위기 좋은 맛집에서 식사한 이야기, 새로 구입한 비싼 물품 자랑 등등..
온갖 행복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듯한 일상들로 가득하죠.
물론 경험하고 가진 것을 자랑하는게 무슨 문제가 있겠냐마는,
여기에 대한 첫 번째 맹점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게시글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처지를 비관하거나 삶의 의욕이 떨어지게 되는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SNS에 이러한 글을 올리는 사람들 역시도 매일의 삶이 행복과 풍요로만 가득한 것은 아닐텐데, 우월한 듯 한껏 과시하여 올린 모습과 평소의 평범 또는 고단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오히려 큰 허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2.
선생님들은 상대적 박탈감 또는 부족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무엇인가요?
저는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 중 ‘인정하는 말’이 제1의 언어인데요.
저는 남들보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 걸음 세 걸음을 더 뛰어야 한다는 ‘노력 강박증’이 있거든요. 그렇게 노력하면 반드시 비슷한 선상이나 조금이라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데, 가끔 이것이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나는 놈’의 그늘에 가려서 노력이 인정받지 못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더라구요.
그래서 매우 인간적인 욕구로,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으로라도 나름의 노력을 인정받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과시할 때도 가끔, 아니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카페인을 마시면 잠깐 동안은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들지만, 사실은 뇌를 속이는 착각인 것처럼 얼마 가지 않아 허무함이 몰려 오더라구요.
3.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에는 타인의 시선 의식과 비교의식이 있습니다.
정종진 교수의 긍정심리학적 관점으로 풀어쓴 ‘이제부터 행복해지기로 합시다’라는 책에도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행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남과 비교하기입니다. 행복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얼마나 만족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짧게 한 단어로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족하는 마음”
4.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있지요.
주인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깁니다. 주인은 종들이 각자 맡은 달란트 안에서 결과와는 별개로 최선을 다해 운용하기를 바랬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5달란트, 2달란트를 맡은 종은 최선을 다했기에 칭찬을 받았죠.
그런데 1달란트 맡은 종은 노력조차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지요. 결국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질책을 받습니다.
1달란트 맡은 종은 왜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을까요?
곁가지이지만 상상컨대, 5달란트와 2달란트 종의 ‘카페인’을 본 순간 의욕이 떨어졌기 때문 아닐까요?
“왜 나는 1달란트 밖에 안돼? 이것 가지고 뭘하라고?”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회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나, 과연 그것이 공정한 것인가?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만, 누군가는 출발 총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빠른 스포츠카를 타고 달릴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세상의 수많은 족쇄를 차고 한 걸음 조차 내딛기 힘든 근본적 불공평함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지요.
이 책이 화제가 되면서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공동선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무적인 모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제 제기와 사회비판만 할 뿐, 무거울지라도 어떻게든 한 걸음이라도 내딛어 보려는 노력이 줄어들었다는데 있습니다.
구조가 어떻게 됐듯, 내게 맡겨진 달란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달려간 과정의 거리만큼 인정받는다는 믿음 안에서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것. 성경에서는 이것이 ‘공정’이며 ‘자족’이라고 말합니다.
5.
저도 요즈음 카페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족의 마음’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박탈감을 느낄 필요도,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요.
“여백과 느림”에도 미학이 존재하듯, 오히려 나의 부족함은 하나님이 채우실 공간이라는 기대감으로 그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삶에 감사하며 충성토록 살아내 보려 합니다.
그래서 ‘엄친아’ 말고 ‘하칭아’ ‘하나님께 칭찬받는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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